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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한국사

한국사 정리 / 향촌 질서의 변화, 천주교-동학, 농민의 항거

by 바방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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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향촌 질서의 변화, 천주교-동학, 농민의 항거



향촌 질서의 변화

    ⑴ 기존 양반들의 지위 유지 노력 :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 및 사우 건립

    ⑵ 부농층의 성장 : 납속이나 향직의 매매를 통해 양반 신분 획득

        - 향전 : 부농층은 수령과 결탁하여 구향에게 대항

        - 수령 및 향리 세력이 강화되었다.

        - 향회 : 수령의 세금 자문 기관으로 위상이 약회되었다.(정부의 향촌 통제력 강화)



천주교, 동학

    ⑴ 천주교

        - 서학으로 소개됨 -> 18세기 후반 남인 실학자들 사이에서 신앙 운동

        - 정부의 사교 규정(제사 거부, 신분 질서 부정) -> 천주교 탄압(대표적 : 1801, 신유박해)

   ⑵ 동학 : 경주 출신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도(1860)

       ⑴ 이념

           - 유-불-도교 + 민간 신앙(주문, 부적), 주기론적 성격, 천주교 교리 까지 포함

           - 시천주, 인내천 사상, 후천 개벽

       ⑵ 최제우 처형으로, 2대 교주 최시형이 동경대전 및 용담유사를 편찬하고 교단 조직을

           정비(포접제)함



농민의 항거 : 세도 정치 -> 탐관오리 횡포 -> 삼정문란 -> 민란의 발생

    ⑴ 홍경래의 난(1811)

        - 서북인(평안도 사람)에 대한 지역적 차별

        - 몰락 양반, 영세농,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한때 청천강 이북을 점령

    ⑵ 임술 농민 봉기(1862)

        - 단성, 진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

        - 정부에서는 봉기 이후 삼정 이정청을 설치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함



※ 보충 설명



부농층 

    -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부농층은 당시에 요호 부민으로 불렸다. 이들은 자기의 전지를

      소유하고 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농민들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비판

    -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힌 천주 교리서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였다. 천주실의 는 17세기 초에 베이징에서 간행하였고, 곧이어 이수광과 유몽인 등에

      의하여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천주 교리서에 대하여 당시 유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독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실학자인 이익의 경우 천주교가

      불교처럼 허망한 종교이고, 천주교의 천당-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현혹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안정복도 천학문답을 통해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엿다.



농민의 유민화 및 도적화

    - 농민들의 불만은 이미 18세기 중엽부터 조작된 무장 집단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횃불을

      들고 다니며 화공을 일삼는 명화적이 횡행하였는데, 이들은 때로는 말을 타고 총을 

      들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한 수적이라 하여 바다나 강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는 무리도

      있었다. 이러한 명화적 가운데는 '단'이라는 호칭을 붙인 큰 집단도 있었는데, 평양중심의

      폐사군단, 재인이나 화척으로 구성된 채단, 떠돌이 거지들로 구성된 유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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