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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한국사

한국사 정리 / 광해군의 중립외교, 인조반정, 예송논쟁

by 바방 2021.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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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광해군의 중립외교, 인조반정, 예송논쟁



광해군의 정치와 인조반정

    - 광해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전개하면서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 하였고,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 하려하였다.

    - 광해군은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여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 결국 광해군과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1623)



인조 반정 이후의 정국

    ⑴ 서인과 남인 : 서인과 남인은 학문의 부리도 다르지만, 정치 사상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음

        - 서인 : 상업과 기술 발전에 호의적이며 노비 속량과 서얼 허통에도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부국강병에 관심이 있었다. 

        - 남인 : 수취 체제의 완화와 자영 농민의 육성에 치중하고 상업과 기술 발전에

                   소극적이였고 왕권의 강화와 정책 비판 기능에 큰 비중을 두었다.

    ⑵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감. 이들은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⑶ 산림의 여론 주제

        - 정치적 여론은 주로 서원을 중심으로 모아져서 자기 학파의 관리들을 통하여

          중앙 정치에 반영

        -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란 이름으로 재야에서

          여론을 주도



예송 논쟁

    ⑴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되며

        정치가 전개

    ⑵ 예송의 전개 : 현종 때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1차 예송(개해예송) : 서인의 1년설이 받아 들여짐

        - 2차 예송(갑인예송) : 남인의 1년설이 받아 들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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