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발해의 역사
● 발해의 건국과 발전
⑴ 고왕(대조영, 1대. 698 ~ 719)
- 연호 '천통'
- 동모산에서 진국 건립(698)
- 당으로부터 발해 군왕으로 불려짐(713) -> 이후 국호를 발해로 고침
-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족으로 구성
⑵ 무왕(대무예, 2대, 719 ~ 737)
- 연호 '인안'
- 북만주 일대를 장악
- 흑수 말갈 문제로 당과 대립
- 돌궐, 일본과는 우호 관계, 당과 신라는 견제
- 장문휴의 수군으로 하여금 산둥 반도 등주를 선제 공격
⑶ 문왕(대흠무, 3대, 737 ~ 793)
- 연호 '대흥', '보력'
- 상경 용천부로 천도(당 문화의 영향을 받음)
- 국립 대학인 주자감 설치
- 3성6부(중앙조직)
- 발해 국왕으로 경상
⑷ 선왕(대인수, 10대, 818 ~ 830)
-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
- 지방 행정 조직 : 5경 15부 62주
- 중국에서 해동성국으로 부를 정도로 번성
●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 대조영과 그 후손들의 고구려 지향성은 일본과의 외교 과정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남
- 속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759년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고 불렀으며 일본에서도
발해의 왕을 고려국왕 으로 부름
- 발해를 가리켜 자주 고려라고 불렀으며, 발해의 사신을 고려의
사신으로 표현한 사례가 일본 측 기록에 많이 있음
● 발해의 중앙 정치 구조
- 당의 3성 6부제를 근간으로 하였으나 삼국시대 귀족 회의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
- 6부 명칭과 정책 집행 체제가 이원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을 통해
발해의 정치적 독자성을 확인훌 수 있음
※ 보충 설명
● 남북국 시대
- 통일 신라의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말한다. '남북국'이란 용어가 최초로
쓰인 것은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고이다.
● 해동성국
-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으로서, 9세기 선왕 때 전성기를 맞이한
발해를 중국에서 높여 부른 말이다.
● 등제서열 사건(효공왕)
- 신라의 최언위가 발해의 오광찬보다 빈공과 등제 석차가 앞서자 당에
사신으로 온 오소도가 아들의 석차를 올려 달라고 요청하였다가 거절
당한 사건이다.
● 쟁장 사건
- 당에 간 발해의 사신이 신라의 사신보다 상석에 앉을 것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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