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배경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은 거란이 고려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철군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1012년 4월 양국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 이전과 같은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였는데, 성종(聖宗)이 그 전제 조건으로 현종(顯宗)의 친조(親朝)를 요구한 것이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6월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파견하여 현종이 병에 걸려 친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공지의 이야기를 들은 성종은 분노하였다. 그리고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군), 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 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시)를 공격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성종이 공격을 선언한 지역은 강동6주에 해당한다. 고려와 거란은 강동6주를 두고 1012년~1014년에 걸쳐 여러 차례 사신을 교환하였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고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였고, 고려는 1014년 8월 송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 회복을 시도하였다. 거란은 1014년 10월 통주를, 1015년 1월 흥화진, 통주, 용주를, 1015년 9월 통주, 영주(寧州, 평안북도 안주시)를, 1016년 1월 곽주를, 1017년 5월 흥화진을 잇달아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매번 영토에 침입한 거란군을 막아냈으나 장수와 군사, 물자가 계속해서 소진되었다. 지속된 전투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1018년 10월 성종은 동평군왕(東平郡王)이자 매제로 대송(對宋)전쟁과 거란의 제2차 침략에 전공이 있는 소배압(蕭排押)을 도통(都統)으로 삼아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도통은 원정군이 편성되면 임명되는 총사령관으로, 주로 공신, 종실(宗室), 대신(大臣) 중에서 선발되었다. 도통과 함께 원정군의 지휘부를 담당하는 부도통(副都統)에는 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렬(蕭虛列), 도감(都監)에는 동경유수(東京留守) 야율팔가(耶律八哥)가 임명되었다. 소배압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진군하였다. 이와 함께 거란은 고려 변경에 위치한 성에 글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흥화진 전투
거란군이 움직이자 고려도 대응에 나섰다.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을 판관(判官)으로 임명하고 208,300명의 군사를 주어 영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1018년 12월 거란군이 흥화진에 도달하였다. 강감찬은 기병 12,000명을 흥화진 근처의 골짜기에 매복시키고, 흥화진 동쪽의 삼교천(三橋川)을 막았다. 예상대로 거란군은 삼교천을 건넜는데, 소배압은 변경의 성을 우회하여 곧장 개경을 공격하려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거란군의 도하가 시작되자 고려군은 막아두었던 강물을 터뜨렸고,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12,000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소배압의 개경 공격
소배압은 흥화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계획을 바꾸지 않고 개경을 향해 나아갔다. 강민첨과 시랑(侍郞) 조원(趙元)이 개경으로 이동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그들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소배압은 개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약탈을 자행하였다. 전방의 성을 함락시켜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약탈로 물자를 보충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1019년 1월 소배압은 개경에서 100리(약 40㎞) 거리에 있는 신은현(新恩縣, 황해북도 신계군)까지 나아갔다. 그러자 강감찬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에게 군사 10,000명을 주어 개경을 방어하게 하였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파병한 원군도 개경에 입성하였다. 또한 현종은 개경 밖의 사람과 물자를 모두 성안으로 옮겨 거란군에 대비하였다. 소배압은 개경에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 회군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는 한편 몰래 금교역(金郊驛, 황해북도 금천군)에 기병 300여 명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기병 300명은 곧 발각되었고, 고려군 100여 명의 야습으로 전멸하였다. 보급이 끊기고 작전마저 실패한 소배압은 철군을 결정하였다.
귀주대첩
거란군은 고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연주(漣州, 평안남도 개천시)와 위주(渭州, 평안북도 영변군)를 거쳐 1019년 2월 귀주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 도착하면서 거란군의 철군 경로가 차단되었다. 이제 거란군은 고려군을 제압해야 국경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양국의 군대는 귀주성 동쪽 교외에서 두 곳의 강을 두고 대치하였다. 몇 번의 충돌이 있었으나 승부는 판가름 나지 않았다. 거란의 대다수 장수는 고려군이 두 곳의 강을 모두 건넌 뒤 어수선한 상황이 되면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는 두 곳의 강을 건넌 고려군은 퇴로가 없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므로 이기기 어려우니 고려군이 두 강의 사이에 도달하면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소배압은 야율팔가의 주장에 따랐다.
양군의 교전이 재개되었다. 거란군은 야율팔가의 주장대로 고려군이 두 강의 사이에 도달하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때 개경을 방어하던 김종현의 군대가 거란군의 후방에 나타났다. 이를 본 강감찬은 김종현의 군대와 함께 양쪽에서 거란군을 몰아붙였다. 이와 함께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며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고려군은 이를 승리의 징조로 여겨 사기가 올랐다. 거란군은 기세를 탄 고려군을 이겨내지 못하였다. 소배압은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까지 추격을 이어갔고,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한편 말, 낙타, 병장기 등 다량의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사(遼史)》에서는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패배하였다는 뜻에서 다타지패(茶陀之敗)라고 하였다. 현종은 귀주에서 대승을 거둔 강감찬과 그의 군대를 영파역(迎波驛, 황해북도 금천군)까지 나가 맞이하여 직접 연회를 베풀고 상을 내리며 찬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거란은 귀주에서의 패배로 군사력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清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또한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의 다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 우피실군은 거란 황실의 시위군(侍衛軍)에서 비롯된 상비군이었다. 주력 부대의 상당수를 잃은 것이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 명에 불과하였고, 야율구리사(耶律歐里思)의 부대만이 온전하였다. 패전의 소식을 들은 거란의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자를 보내 ‘네가 적을 가볍게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얼굴을 어찌 다시 볼 것인가? 마땅히 네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고 죽일 것이다.’라며 크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1019년 3월 소배압이 귀환하자 성종은 군율을 어긴 죄를 지적하고 면직시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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