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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한국사

한국사 정리 / 해방 전후의 정치 상황

by 바방 2021.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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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해방 전후의 정치 상황

 

일제로부터의 광복

 -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독립을 시켜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독립

 을 결의함

 - 포츠담 선언(1945. 7.)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재확인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항복 뒤 고립된 일본은 1945년 8월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됨과, 8월8일 소련의 참전을 계기로,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함

 - 우리 민족에게 해방은 끊임없는 항일 투쟁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의 승리라는 국제 환경 속에서

 다가온 '불완전한 해방'이었음

 

해방 이전의 건국 준비 활동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5월 기초 정당을 '한국 국민당'에서 

 '한국 독립당'으로 확대 개편하고, '삼균주의'를 정강 정책으로 채택함 또한 학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적 측면을 강화하였으며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함으로써

 이를 재확인함

 - 조선 독립 동맹(1942) : 중국 화북 지방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은 

 1942년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 휘하에 '조선 의용군'을 둠

 - 조선 건국 동맹(1944) : 국내에서는 여운형,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비밀 결사 조직이자

 좌우 합작적 성격을 가진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

 

해방 직후 각 정치 세력의 동향

 - 광복 직후 조선 건국 동맹의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익과 우익의 합작 형태로 출범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1945. 8. 15)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을 목표로 치안대를

 조직하고, 전국에 145개 지부를 건설

 - 이후 연합군에게 정부로 인정받기 위하여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 허헌을 국무총리로

 선임하고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함. 그러나 실권은 조선 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이 장악하여

 좌익 정부나 다름없었음

 - 조선 인민 공화국 선포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아놀드 소장을 군정 장관으로 임명함

 - 미군정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친미적인 우익 정부의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 민주당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함

 - 한편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결성하고 '좌우의 통합,친일파제거론'을

 내세우며 세력을 규합함

 - 미군정은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주석인 김구의 귀국도 개인

 자격으로만 허용함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28.)

 -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무장관이 모여 한국 문제를 논의

 -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개최하고 한국을

 최고 5년동안 미-영-중-소의 신탁 통치 하에 두기 위한 협약을 맺도록 결정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은 격렬한 민족 갈등을 야기함

 - 초기에는 좌우익 모두 반탁 운동을 단행하였으나 좌익은 곧 찬탁으로 선회함. 이에 우익은

 신탁 통치 반대를 주장하며 찬탁은 반민족적 매국 행위라고 주장

 - 반면 좌익은 최고 5년의 신탁 통치 기간은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 또 이 

 기간 동안 식민 잔재 해결을 하자고 주장하며 찬탁을 지지

 - 우익 반탁 진영은 남조선 민주 의원(1946. 2. 14.,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 김규식), 좌익은

 민주주의 민족 전선으로 결합

 

미소 공동 위원회(1차 : 1945.3./2차 : 1947.5.)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됨

 - 미국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우익 세력을 미소 공동 위원회의 합의 대상에 포함시키려 한 

 반면, 소련은 신탁 통치를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 단체만을 고집함

 - 즉, 양측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관철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회의는 두 차례 무두 결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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