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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한국사

고려대거란 강동6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by 바방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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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과 박천강(博川江)에 머물고 그 이북 압록강 유역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였으므로 고려의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 안융진(安戎鎭:安州)을 공격하였으나 고려의 항전으로 실패하자 거란군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측의 서희(徐熙)와 강화하여, 거란측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 연호의 사용을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지역 280리를 고려가 점유한다는 화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994년 강동(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하여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미상)·곽주·귀주·안의(安義:定州)·흥화·선주(宣州:宣川) 등에 성보를 쌓고 6주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후삼국 이후 처음으로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게 되고 군사 ·교통상의 요지를 확보함으로써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 확장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그뒤 거란은 고려가 입조 등의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1010년(현종 1) 2차 침입, 1018년 3차 침입을 감행하여 강동6주는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거란의 3차 침입 때는 강동6주에 구축된 성진(城鎭)의 전략적 기능에 힘입어 강감찬이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거란군의 고려침략을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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