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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2

고려대거란 강동6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건국 초 고려의 영토는 청천강과 박천강(博川江)에 머물고 그 이북 압록강 유역까지는 여진족이 거주하였으므로 고려의 북방진출에 큰 장애가 되었다. 993년 안융진(安戎鎭:安州)을 공격하였으나 고려의 항전으로 실패하자 거란군의 소손녕(蕭遜寧)은 고려측의 서희(徐熙)와 강화하여, 거란측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 연호의 사용을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 여진의 거주지역 280리를 고려가 점유한다는 화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994년 강동(압록강 동쪽)의 여진부락을 소탕하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하여 장흥(長興:泰川)·귀화(歸化:미상)·곽주·귀주·안의(安義:定州)·흥화·선주(宣州:宣川) 등에 성보를 쌓고 6주를 설치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후삼국 이후 처음으로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게 되고 군.. 2024. 3. 12.
고려대거란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전쟁의 배경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은 거란이 고려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철군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1012년 4월 양국 갈등의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내 이전과 같은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였는데, 성종(聖宗)이 그 전제 조건으로 현종(顯宗)의 친조(親朝)를 요구한 것이다. 고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6월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파견하여 현종이 병에 걸려 친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전공지의 이야기를 들은 성종은 분노하였다. 그리고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군), 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 귀주(龜州, 평안북도 ..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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