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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 공무원/한국사

한국사 정리 / 1920년대 국-내외 항일 운동

by 바방 202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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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1920년대 국-내외 항일 운동

 

1920년대 항일 운동

① 국내 항일 결사 : 보합단, 천마산대, 구월산대

② 6-10 만세 운동

 - 1926년 순종 인산일을 목표로 사회주의 세력과 학생 운동 세력이 각각 준비함

 - 향후 민족 유일당을 결성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됨

③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항쟁

 - 1929년 11월 3일 조선 학생과 일본 학생들의 충돌로 인해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됨

 - 신간회에서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대한 진상 조사단을 파견

 

해외 항일 독립 운동

 - 봉오동 전투(1920. 6. 7.) :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군무 도독부, 군민 회군과 연합하여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157명 사살

 - 청산리 전투(1920. 10. 26.) : 김좌진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 군정서 군과 대한 독립군

 등의 독립군 연합 부대는 10여 회의 전투 끝에 1200명을 사살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림

 - 간도 참변(경신참변, 1920) :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독립군 소탕을 

 핑계로 한인촌에 대한 학살, 방화를 자행

 - 자유시 참변(1921) : 소련 적군에 의해 발생

 

독립군의 재정비 - 3부의 성립

① 참의부(1923)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할 부대

② 정의부(1924)

 - 이탁, 지정천 등이 길림, 봉천을 중심으로 남만주 지역을 통치 구역으로 조치 

 - 휘하에 1500여 호와 700여 명의 군대를 거느린 가장 조직적인 단체가 됨

③ 신민부(1925) :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 영토에서 돌아온 독립군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대표적 인물 : 김좌진)

④ 미쓰야 협정(1925) : 일제는 만주 군벌과 공동으로 독립군을 탄압

⑤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3부의 통합 운동이 활발해져 혁신 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통합

 

 

※ 보충 설명

 

천마산대

 - 1919년 3-1 운동 이후 최시흥을 대장으로 한말의 군인들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500여 명의 단원이 평북 천마산을 근거로 유격전을 벌였다. 1920년 일본 경찰의 공격을 피하여

 만주고 건너가 독립군에 편입되었다.

 

의열단

 - "그들의 생활은 밝음과 어두움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즐기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하였으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의열단의 파괴 대상

 - 의열단의 파괴 대상은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 왜적 중요 기관이었으며

 조선 총독 이하 고관, 일본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이

 살해 대상이었다.

 

청산리 대첩의 전과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발표는 일본군 사망 1254명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에서는 

 약 2000명,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의  「모닥불」에서는 사상자를 3300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간도 참변(1920)

 -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은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간도 지방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학살된 한국인은 훈춘 형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연안현에서 17명, 그 밖의

 현에서 804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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